누구의 사명을 받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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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사명을 받아 살고 있는가?
강수인 목사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당신의 할일인 사명을 감당하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많이 들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안타까움을 듣고 예수님을 팔고 자결하여 자기가 해야 할 마귀의 사명을 다하고 죽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여러분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주님을 만나 거듭남의 기적을 보고 성전에 뛰어 들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참으로 놀랍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영광의 끝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이루는 모습을 봅니다. 안타깝게도 마귀들인 무당과 솔로몬의 끝도 사울왕의 끝도 좋지 않은데 그들의 사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주여....
◆분명한 목표의식 사명의식
19세기 말엽 미국에는 제임스라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의 형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문의 출신들이었으나 19세기의 미국 사회에서 유명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답니다.
■한 가문의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제시와 프랭크였습니다. 종종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금고털이, 열차털이 강도로 유명한 총잡이였습니다.
이들 형제가 처음부터 사회의 반항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환멸과 남군의 패배로 인한 사회적 소산이었습니다.
■또 다른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윌리암과 헨리였습니다. 시대적 상황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로, 또 소설가로 미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명의식입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사명의식이 있냐 없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유훈만은 잊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죽더라도 내가 못다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유훈대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일처럼 여기며 임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잠 20:7)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 (잠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사명감? 그런데 사명감은 누가 주는가요?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단순히 “사명을 감당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사명을 받아 살고 있는가?”를 묻는 자리입니다.
1. 예수님과 유다 — 같은 시간, 다른 사명.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반면 가롯 유다는 같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결국 다른 영의 길을 따라 자기 생을 마무리하죠.
*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둘 다 ‘끝까지 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감당. ◆유다 → 마귀의 뜻을 끝까지 따라감.
* 즉,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의 사명’을 이루거나 이루고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영의 흐름을 따라 살고 있는가?
2.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 사명의 시작은 ‘만남’부터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았던 사람은 사명이 없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아직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상태’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만나는 순간 걷기 시작하고 뛰어 들어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여기서 핵심입니다. 사명은 ‘능력’이 아니라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3. 사도 바울 — 사명은 ‘방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반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생의 목적이 완전히 바뀝니다.
* 그래서 바울의 삶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나는 이미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 사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의 지속성’입니다.
4. 사울과 솔로몬 — 시작은 하나님, 끝은 다른 곳.
사울, 솔로몬.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했다는 것.
◆사울 → 겸손하게 시작.
◆솔로몬 → 지혜를 구하며 시작.
그런데 끝은 왜 무너졌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명이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 사람의 눈을 의식했고.
◆솔로몬 → 쾌락과 타협을 했다.
결국 이렇게 됩니다. 사명을 잃은 사람은 결국 ‘자기 욕망의 사명’을 살게 됩니다.
5. 무당과 마귀의 사명 — 존재는 중립이 아니다
주님이 던지신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들의 사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중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든지, 세상(마귀)에 속하든지. 그래서 무당이나 점술, 어둠의 길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다른 영의 통로가 된 상태입니다.
즉, 그들도 ‘사명’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의 목적을 이루는 사명입니다.
6. 결론 —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고 죽는다.
이게 결론입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도 이미 어떤 흐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 할 것인가
◆유다처럼 “후회 속에 끝낼 것인가”
◆바울처럼 “끝까지 달려갈 것인가”
◆사울처럼 “중간에 변질될 것인가”
(예화)
◆재진이의 개미연구. (하나님은 섬세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개미에게 일어나지요?)
나는 개미들의 활동과 공동체 생황을 관찰하기 위해 집에서 개미를 키워보았다. 음식을 찾는 개미, 알을 돌보는 개미. 병정개미 등 그들은 철저히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으며, 모두 암컷 개미였다. 수컷 개미는 번식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지고 짝짓기가 끝나면 바로 죽는다. 여왕개미는 알을 낳기 위해서만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내가 마구 잡아넣은 개미들인데도 금세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척척해내고 있었다. 곤충학자들은 개미가 페로몬을 분비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페로몬은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듯 서로를 확인하고 식량의 위피를 알려주며 집을 짓고 길을 만들기도 한다. 개미들의 세계는 불평을 하는 일이 없고 자기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개미들처럼 질서가 있고 책임에 충실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재진.
(예화) ◆지구를 쓰는 사나이.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어떤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들어오자 대부분사람들은 식사하다 말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평소에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서였습니다. 이 때 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그 식당의 하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하인의 한숨을 듣고는 밖으로 나가 홰 한숨을 내쉬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합니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영광스런 인물인데 반해 나는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서 식당의 마당을 쓸고 있는 신세니, 나 자신이 가엾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자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위로하였다. "친구여! 당신은 식당의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쓰는 것입니다." 자 누가 준 사명인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가? 아님 세상이 주는 비교의식과 종의식을 주는 마귀의 사명을 받았는가? 말입니다.
마지막 질문 (설교 핵심 포인트)
여러분은 지금 우리는 누구의 사명을 받아 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까? 아니면 마귀가 미혹하는 환경과 욕망이 만든 사명입니까?
(예화) ◆각기 다른 사명. 먼저 교회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본이고 두 번째는 합력입니다.
다리가 입을 보며 "너처럼 뻔뻔스런 놈은 없을 거야. 내가 뼈 빠지게 뛰어다니며 번 돈으로 넌 가만히 앉아 모두 먹어 치우기만 하니 말야." "좋아, 앞으로 먹지 않을 테니 네 원대로 푹 쉬어라." 입은 그 말을 하고 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자 다리는 힘이 빠져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저.. 네가 먹어야 내가 힘을 차려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다리는 입에게 사정했다.
"음, 그렇다면 이제부터 밥을 먹을 테니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다리는 무언가 깨달은 듯 달리기 시작했다.
기도문 주여… 내가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 보게 하소서 겉으로는 사명을 말하지만 실상은 나를 위한 길을 가고 있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붙잡게 하시고 사도 바울처럼 흔들려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하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고백이 “다 이루었다”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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