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세상과 상대의 무엇부터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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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과 상대의 무엇부터 보는가?
●성경적으로 보면 선을 보는 사람과 악을 보는 사람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 어떤 사람이 굶주린 아이들을 돕기 위해 후원금을 보냅니다.
2. 어떤 사람은 "저 아이들이 도움을 받겠구나."를 봅니다. 3. 어떤 사람은 "그 단체 대표가 얼마를 가져갈까?"를 봅니다. 물론 후자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부정한 단체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상황에서 선보다 악을 먼저 보는 습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면 "병자가 나았구나."를 본 사람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왜 고쳤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면 "사람이 자유하게 되었구나."를 본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귀신의 왕 힘으로 한 거 아니야?"를 보았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보는 곳이 달랐습니다. 이런 일을 보는 경우의 핵심에는 몇 가지가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신뢰의 결핍.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쉽게 믿지 못합니다. 예전에 속았고, 배신당했고, 이용당했고, 사기 당했던 경험이 있으면 "누군가 좋은 일을 한다고? 분명 뒤에 뭔가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분별이 아니라 의심이 기본 값이 됩니다.
2. 교만한 정의감.
이것이 사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남들처럼 순진하지 않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보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항상 비교하면서 죄인보다 자신들이 더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역사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3. 결과보다 동기를 지나치게 따짐.
●어떤 사람이 100명을 살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보통은 "100명이 살았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근데 저 사람도 명성을 얻었잖아."라고 합니다. 명성을 얻은 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00명이 살았다는 사실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선한 일은 누군가는 도움을 받고, 누군가는 보람을 얻고, 누군가는 수익을 얻고, 이렇게 함께 움직입니다. 농부도 돈을 벌고 소비자도 사과를 먹습니다.
택배 기사도 돈을 벌고 고객도 물건을 받습니다. 출판사도 돈을 벌고 독자는 책을 읽습니다.
모든 중간 과정을 악으로 보면 세상은 거의 돌아갈 수 없습니다.
4. 감사보다 의심이 습관이 된 상태. 이것이 영적으로는 가장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는데 어떤 사람들은 "오늘도 먹을 것을 주셨네."라고 감사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또 만나야?"라고 불평했습니다. 같은 은혜를 받고도 시선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사에 익숙한 사람은 은혜를 발견하고, 불신에 익숙한 사람은 문제를 발견합니다. 말씀 가운데 특별히 공감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왜 중간 사람만 보느냐."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후원을 받아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그 아이보다 후원단체 운영비를 먼저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좋은 정보를 제공해서 삶이 나아졌는데, 그 유익보다 제공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 선의 열매보다 중간 통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종종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요셉을 통해, 바울을 통해, 교회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왜 하나님이 직접 안 하시고 모세를 쓰시지?" 라고만 생각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놓쳤을 것입니다.
●설교적으로 정리하면 "분별은 필요하지만, 의심이 믿음을 삼켜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면 세상에 선을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완전히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은 경계하되 선은 기뻐하고, 부족함이 있어도 열매를 인정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한 결과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나친 의심보다 더 성숙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만 바라보면 실망할 일이 끝이 없습니다. 모세도 부족했고, 다윗도 넘어졌고,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부인했고, 바울조차 자신 안에 죄의 법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좋은 예입니다. 유다는 아마도 늘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을 때도 겉으로는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왜 낭비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정의로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힙니다. (요 12:6) "이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도둑이므로..."
결국 유다는 가난한 자보다 돈주머니를 보았고, 하나님의 역사보다 자기 계산을 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향유의 낭비처럼 보이는 행동 속에서 장례를 준비하는 사랑을 보셨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보는 눈이 달랐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형들은 악한 마음으로 요셉을 팔았습니다.
분명 죄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은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요셉은 형들의 악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악은 악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그 악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저걸 왜 하지?" "저 단체가 무슨 속셈이 있지?" "저 회사가 이익 보려고 하는 거잖아." 여기서 생각이 멈춥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설령 저 사람에게 불순한 동기가 조금 섞여 있다 해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누구를 살리고 계실까?"를 생각합니다. ●물론 사기를 분별해야 하고 악을 눈감아 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시선이 "어디에 악이 숨어 있나?"가 아니라 "하나님은 여기서 어떤 선을 이루고 계실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약해질수록 사람의 동기를 분석하게 되고,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이들이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 되었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은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전하는 사람의 불순한 부분만 바라보다가 복음이 전파되는 열매 자체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의 성숙은 "누가 얼마나 이익을 얻는가?"를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어떤 선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볼 수 있는 눈이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불순함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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