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멈춰 있는 성도가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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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멈춰 있는 성도가 되지 말라.
두 명의 스님이 길을 걷다가 아릿다운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그 여인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말을 하며 희희락락하며 떠들다가 다른 스님에게로 다가옵니다.
여인의 근처에도 못가고 스스로 절제한다고 생각했던 스님은 그 떠들고 방자하게 보였던 스님에게 한참 후에 말합니다. “스님은 어찌 경건하지 못하게 그리 여인을 가까이하며 여색을 탐하고 그렇게 말을 섞으며 도를 그르치십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말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나는 그 여인을 만나서 좋은 대화를 나누고 다 잊었는데 어찌 스님은 아직도 그 여인을 마음에 두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들어내고 억지로 좋아 하는 것을 멀리 한다고 생각하며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여 그 의 때문에 상대를 비판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몰아 자신을 높이려 하는 경우가 자신도 모르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 참된 도인가? 피하는 것과 억지로 절제하는 것처럼 자기의 경건을 주장하며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을 무지하다고만 말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린 자기 입장에서만 보는 특별한 교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눈을 감고 폭 넓으신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일방적인 눈으로 범죄하지 못하도록 돕는 다른 사람의 눈을 허락하셔서 서로 소통하여 더 많은 지혜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 자신의 판단으로 생각하는 의나 악을 마음에 두고 나쁜 생각을 할 것인가?
의문이 생기면 질문하여 마음에 해답과 공의의 평강을 누릴 것인가?
● 무엇을 가까이하고 무엇을 마음에 품는가? 그리고 입으로 말하는가? 그게 나입니다.
* (시 1: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 (행 1: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행 2: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집중력과 일의 우선순위, 이게 안되면 매사 헝크러진 사람이 되고 맙니다. 늘 어수선하고 중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바빠도 여유가 있고, 언제나 한가한 듯한데도 일의 진척도 빠르고 중심도 잡혀 있습니다.
● 등산객이 시골의 한적한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 옆 조그마한 쪽문에 “시간은 있는데 많지가 않다?”라는 한자어가 적혀 있었답니다. 『다불이면 유시(多不有時)』라? 는 참으로 귀하고 깊은 뜻이 있는 문구를 보게 됩니다. 등산객은 그 말뜻이 더 궁금해져서 그는 옆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뭔 일인가요?』 등산객이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저 한자성어는 누구 작품인가요? 아주 멋지네요.』 노인은 여전히 귀찮은 표정이었습니다. 『내가 쓴 거요.』 『그럼 의미를 좀 가르쳐 주시지요?』 등산객은 노인에게 정중히 말했습니다.『의미는 뭔 의미? 그냥 우리 손자 녀석이 화장실은 W.C 라고 하기에 다불유시(WC)라 쓴 거지. 자넨 젊은 사람이 화장실도 몰라?』 ^^ 우리는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때가 있고 더러는 외국어를 한자로 만들어 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달려가다가도 남의 일에 간섭하느라, 잠시 자기가 하던 일을 까먹고, 헛된 것에 미혹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붙잡는 일에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
●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기도나 금식으로 과거에 멈춰 있는 성도? 자기 의로 인해 경건을 재료로 사용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금식 대신에 감사를.>
● (왕하 8:1)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주께서 정하신 뜻을 바꾸기 보단 기도로 알았다면 감사로 피할 길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국에 살던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1620년의 일입니다.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찾아오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 또 한 번 대단히 어려운 위기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농부 한 사람이 이런 제의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비록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하지 못하고 여건도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 금식 대신 감사 기간을 정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농부의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주간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금식해야 할 상황에서 이젠 감사를 찾아 벌인 추수감사 축제가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운동력이 아닐까요.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나요? 가까이 하는 동행과 믿음의 감사 때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참된 자유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여 순종의 엄청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참이 되십니다. 그 참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 큰 은혜이고 참된 일이 되기 때문에 잠시의 고난과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쾌락과 소통하기 싫으셨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아시는 것이지요.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행하면 내 마음이 먼저 압니다. 고통스러워 집니다.
참 자유는 바로 참된 진리 안에 자유여야만 보응과 보상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금식은 세상에 속한 나의 정욕을 채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얻게 되는 참 자유를 누릴 힘을 얻는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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