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에 사는 사람 요한복음 9장 25~38절
페이지 정보

본문
큰 기쁨에 사는 사람. 요한복음 9장 25~38절
391장(오 놀라운). 423장(먹보다도 더). 338장(내 주를 가까이). 428장(내 영혼에 햇빛 비추니).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으되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18세기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프 렌(Christopher Wren)이 세인트롤 성당을 재건 할 때의 일입니다. 여러 해가 걸리는 큰 공사를 추진해 나가던 어느 날 크리스토프 렌은 평상복 차림으로 공사현장을 나가보았습니다.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느라고 수고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묻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여섯 자 길이에 석 자 두 폭 되는 돌을 다듬고 있소.”
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반갑지 않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오. 벌써 몇 해째 이렇게 돌만 다듬고 있소.”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사람 중에서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생을 어떤 식으로 살아오셨습니까?
● 현대인은 지식은 있으나 확신이 없습니다.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자신 있는 일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또한 재산은 있으나 만족감이 없었습니다. 권력도 있으나 성취감이 없습니다. 가진 것은 옛날에 비해서 확실히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것 같은데 왠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내 처지와 내 형편을 몹시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내 형편을 저주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우울한 나날을 보냅니다.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 기쁨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니요 사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 있고 큰 사랑을 받는다 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리 위에 서기보다 진리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동경하면서도 그 안에 살기는 원치 않습니다.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구하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은 진리 안에 사는 것이요,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자아 인식(自我認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두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신발이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있는 신발도 많지만 옷 색깔과 맞지 않고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해서 잔뜩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새 구두를 사겠다고 구둣방에 갔는데 역시 못마땅했습니다. 이 구두도 시원치 않고 저 구두도 시원치 않고…… 그저 신었다 벗었다 하면서 가게 안을 다 돌아보아도 마음에 쏙 드는 구두가 없었습니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면서 다른 가게로 들어가려 하는데 뒤에서 아주 밝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문득 생각했습니다. ‘누구는 두 발이 없어서 아예 신발을 신을수 조차 없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 나는 구두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일까.’
<발이 있어서 슬픈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사 그 놀라운 능력은 십자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평에는 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깨닫는 자에게는 진정으로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사랑 안에 있는 자가 발견되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기쁨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가장 온전하고 가장 뚜렷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랑이 기대하는 바는 기쁨입니다.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없으면 사랑을 준 사람이 피곤합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다 축제입니다. 축제가 따로 없습니다. 기쁨 그대로가 축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체험입니다.
● 기쁨을 두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①‘이 시간을 위해 내가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고생하고 눈물겨웠던 것, 실패, 모욕당한 일 다 좋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기쁨입니다. ②‘이제 죽어도 좋다’ 하는 마음입니다. 앞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이제 소원을 다 이루었으니까 이대로 끝나도 좋다’ 하는 기쁨만이 있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한 맹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9장 전체에서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의미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 나면서부터 맹인인 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마흔입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오늘도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 일행이 그 앞을 지나갑니다.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십니다. 당장 눈을 뜨게 되는 것도 아니요 실로암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4킬로미터(십리)길입니다. 보통사람도 한 시간 걸리는 거리이니 장님의 몸으로는 족히 4시간은 가야 할 길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십리길을 어정어정 걸어가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자기 손으로 실로암 물을 퍼 올려서 눈을 닦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눈앞에 열렸습니다!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마는 얼마나 춤을 추었겠습니까? 얼마나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얼마나 기뻐서 날뛰었겠습니까? 그가 눈을 떴다고 덩실덩실 춤을 출 때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당신 눈을 뜨게 했느냐’ 하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에 시비가 생깁니다. 왜 안식일을 범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낮잠을 자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도 생산적으로 지키면 안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맹인이 눈을 떴으니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한 안식일입니다. 이 기쁜 소식과 함께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고 모든 피곤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깨끗한 일을 왜 쓸데없는 규례 때문에 비판하고 트집 잡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면 얼마나 따분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왜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함께 축하라고 격려해주지 못합니까? 장님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둥근 마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함해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할 때 그는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여기에 깨끗한 신앙, 깨끗한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근심을 더한다고 합니다. 요새는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필요치 않는 것을 잔뜩 알아가지고 그것 때문에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장님은 깨끗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 상대의 수준을 누가 정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단순해야 천국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힌 지식, 단순한 마음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 깨끗한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 기쁨, 그 신앙은 경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다는 경험!경험에 기초한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신학이 아닙니다. 다만 체험일 뿐입니다. 나를 눈뜨게 한 사람이 누군지, 그날이 안식일인지 아닌지 이 소경으로서는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내 눈이 떠졌다고 하는 깨끗한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던 남이 뭐라 하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는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이 주관적인 경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그에게 닥친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남들 기분은 어떻든 나는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쩌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패도 있고 절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날의 뼈아픈 체험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 개인적으로 이 사랑을 바로 깨닫고 체험할 때에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고침 받은 맹인은 그 체험 뒤에 알고자 했습니다. 17절에서 ‘선지자’라고도 하고 33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기쁨에 사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기쁨에 사는 사람은 만사를 기쁨이 넘치는 믿음의 눈인 긍정적으로 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이 몹시 슬프게 보입니다. 장님이 눈을 뜨고 기뻐할 때에 왜 저들은 그 기쁘고 엄청난 감격에 동참하지 못합니까? 장님 스스로 간증하는 것처럼 창세 이후로 장님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엄청난 기적이 베풀어졌으나 어찌하여 너희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의심하고 트집 잡느냐고 고침 받은 장님은 참으로 답답해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간증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말입니다. ‘함께 즐기자’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기쁨을 중심으로 한 축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가 보고 믿고, 나 또한 거기에 사랑으로 동참하면서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그 자리에 교회됨의 진정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잠님은 답답해서 말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상하다” 영적인 눈과 같이 육의 눈도 눈 먼자가 있고, 눈 뜬 자가 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맹인이었던 자가, 귀 벙어리가 말 못하는 벙어리가 사죄의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주께서 내 죄를 사해주셨다, 십자가의 공로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를 쓰신다 하는 그 은혜와 저 앞에 있는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기쁨에 오늘을 삽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그 기쁨으로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부르심으로 죄인이 사도되었다는 것 때문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삭개오가 그 기쁨 때문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막달라 마이라는 그 기쁨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도 예수님께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감격 때문에 자기 집에다가 비석을 세워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도 영광으로, 특권으로 받아들입니다. 은혜에 감격한 삶은 매일 매일이 축제입니다. 이 축제 안에 화해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이 축제 안에 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오늘도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첨부파일
-
큰 기쁨에 사는 사람.hwp (23.5K)
1회 다운로드 | DATE : 2020-07-22 18:39:01
- 이전글산 자와 죽은 자의 잔치(살전 4;15-18) 20.07.22
- 다음글내 속이 상할 때 시 143:1-6 20.07.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